짝수의 함정

두 개의 상황이 있다. 하나는 그 시작과 끝을 찾는 것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어지럽고, 또 하나는 실수로 인한 작은 흩뜨림조차 용납할 수 없는 완벽한 상태. 나무향 가득한 전시장에는 무질서와 질서, 혼돈과 평정, 불안과 평온, 단단한 덩어리와 복잡한 얼개가 공존한다. 그러나 자칫 이분법적인 상황의 대치로만 귀결될 것만 같은 이 공간에는 정의내릴 수 없는 분명한 실체가 있다. 그것은 눈앞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형체들이 지닌 부피로, 길이로, 공간 한 구석에 묵직하게 자리한 덩어리로, 그것들을 분주하게 쌓아올렸을 행위의 자취로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그 존재를 명증한다.

이아람은 대상을 정의하는 수많은 과정 안에 빗겨나 있는 비가시적인 관념들에 주목해왔다. 그 관념은 하나의 명확한 언어, 분명한 형태로 정의내리는 과정 안에서, 굳이 정의할 필요 없이 남겨지거나 누락됐던 것들, 관심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던 아주 미세한 순간들, 경험들, 존재들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제시된 상황들 속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언어의 논리 체계로 설명되거나 단일한 이미지로 제시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언어의 뉘앙스처럼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며 나름의 의미를 전달하면서 작업의 중요한 사유를 제공하는 단서이자, 조형적 행위를 촉발하는 동기로 자리한다.

전시의 제목이자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왜 자기 방 정리를 해야 하는가 혹은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는 본질적으로 같은 대상에서 출발하여, 동일한 재료를 사용하고, 같은 시간선상에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행위를 반복하면서 확인하게 되는 것들, 이를 테면 당연히 존재했던 대상을 의식적으로 설명하거나 정의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갑작스러운 당혹감, 그것을 인식의 체계 안에 끌어들일 때마다 벌어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순간들, 철저한 계획과 복잡한 수치들의 기록을 통해 파악하려고 해도 늘 예상을 벗어나는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다. 전시장 한 가운데에 푹 파인 것처럼 자리한 옛 비상탈출로는 그것의 생김새와 오래된 건물이 지닌 구조적 특징으로 인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자주 기억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20일 남짓한 시간동안 이 공간을 자로 재고, 수치를 적고, 나무를 자르고, 순서를 정하여 맞추고, 다시 놓는 과정을 무한 반복하면서 어지럽히고, 정리된 상태로 옮긴다. 절반은 각을 맞춰 정리된 상태로, 나머지 절반은 어지럽힌 채 제시된 상황은 비상탈출로의 부피를 가득 채운 정량의 목재를 각각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서로 다른 시각과 행동이 동원되어야만 간신히 인식 가능한, 아니 어쩌면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이 애초부터 무의미할지 모를, 이상한 덩어리들의 대치상태로 귀결된다. 충분히 익숙할 만한 시간을 거쳤음에도, 그 결과적으로는 굉장히 낯선 두 개의 상황으로 번역된 상황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상작품 «그러니까,»에서는 장면이 제거된 채 몸이 기억하는 익숙한 행위를 언어로 옮길 때 벌어지는 역설적 상황들을 이야기한다. 전체 영상 길이의 2/3를 차지하는 검은 화면은 말더듬기,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지시대명사의 반복 사용, 민망한 웃음으로 채워지다가 이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매듭을 완성하는 장면으로 갑자기 전환된다. 두 개의 다른 화면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숙련된 행위를 다른 방식, 특히 발화로 통해 옮길 때 벌어지는 망설임, 어색함, 답답함의 순간들이며, 이것은 이내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는 단호한 몸짓으로 전환되면서 재빠르게 모습을 감춘다. ‘매듭을 만든다’는 동일한 상황에서 출발하지만, 이것을 서로 다른 재현의 방식으로 접근할 때 벌어지는 감각과 경험, 인식의 편차는 두 개의 영역이 지닌 고유의 의미를 보충하면서, 둘 사이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반복된 혹은 누적된 시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동시에 이것은 언어화된 사고가 지닌 함정과 발화의 한계,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완벽하게 체화된 경험과 기억의 문제를 건드린다.

독자적으로 존재할 때 하나의 완벽하고 절대적인 질서처럼 보이는 것들은 상대적인 상황 속에 놓이거나, 본래와 다른 형식으로 전환될 때 잠재적인 불안정성, 유연성을 드러낸다. 이아람의 작업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정리를 하는 것, 혹은 설명한다는 것, 정의한다는 것은 반복된 경험과 충분한 시간을 통해 하나의 약속으로 자리한 언어의 체계 혹은 언어화의 과정과 많이 닮아있다. 결국 자신의 방을 정리하는 것,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 문제는 잠재적 변수들로 가득한 경험과 사유의 영역을 언어 혹은 기호라는 틀에 가둬야 하는가, 과연 가둘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지며, 작가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최대한 유보할 수 있는 방법들을 지금도 부지런히 찾고 있는 중이다.

황정인
전시 «왜 자기 방 정리를 해야 하는가 혹은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 머릿글, 2017